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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는 나랑 눈바람이 몰아치는 곳으로 가자

가서 영영 돌아오지 말고 사라져 버리자

 

이건 도망이 아니야,

아주 멀고 긴 여행 같은 거지

그러니까 떠나올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는 하지 않아도 돼

 

이 여행의 이름을 사랑의 도피라고 붙여도 돼?

괜히 특별한 기분이 들잖아

 

너랑 내가 사랑이라도 하는 거 같고,

그것도 이제껏 이뤄 놓은 거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냥 내 기분이 좋잖아

 

/ 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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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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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가운데 두고

너와 마주 앉아 있던 어느 겨울의 기억

 

학교의 난방시설이 온통 고장 나는 바람에

입을 열면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저녁의 교실

 

네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퍼져가는 모양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는 생각

 

뭐 보느냐고 네가 묻자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너,

라고 대답하고 말았던 그날

 

/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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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절지만한 창을 스치는

낯선 새 그림자 따라

휘파람 불며 길을 나서요

전깃줄을 이어폰처럼 끼고 흥얼거리는 가로수

어떤 날의 바람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 귀퉁이만 잘근잘근 씹다가

주머니 속에 반짝이는 동전

그 상냥한 음정만 매만지고 오기 일쑤죠

구인정보지 활자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연탄재 꼭꼭 눌러 밟으며 집으로 가는 길

리어카에 폐지를 실은 노인들이

물 먹은 달을 어깨에 지고 언덕을 오르면

이윽고 무릎을 펴고 일어나는 붉은 십자가

눈 내리고 럭키슈퍼 유리창엔 김이 서리고

호빵도 몇 촉의 그리움으로 환해져서

마음은 어느 함박눈 내리던 한 시절에

전보를 치는데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도 넣지 않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일

 

/ 신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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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꼭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는 함박눈 같고 나는 꼭 12월 28일쯤의 질척하고 거무튀튀한 녹다 만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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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지금은 헤어져도 언제든 한자리에 다시 모일 수 있으리라 다짐하던 순진한 기만.

 

-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

 

살아남은 것도 죄고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도 죄라는, 너나 나나 몹쓸 인간이라는 자조와 책망이 눈빛에도 말투에도 깃들어 있었다.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 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 걸.

 

-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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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는 언제 쓰였지? 적어도 이천 년은 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은 이천 년 전에 써진 글을 읽으며 감동하고 위로받고 황홀해하고 미친다. 그리고 믿는다. 섹스 없이 아이를 낳았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그건 사십 일 동안 비가 내렸다거나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사건인데…… 터무니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라는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

 내겐 부활과 동정녀의 잉태가 필요하다. 윤리나 과학이 끼어들 여지없는 기적이 필요하다. 천 년 후가 필요하다. 종말 혹은 영생이 필요하다. 미친 자아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도 좋으니, 당신이 필요하다.

 

 믿음이 필요하다.

 

-

 

 ●

 네가 올 줄 알았다.

 오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분명 너를 기다렸지만, 내가 죽기 전에 오길 바라는지, 죽은 후에 오길 바라는지…… 혼란스러웠다. 살아 있을 때도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해 종종 너에게 선택을 미뤘고 때문에 핀잔을 들었는데,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죽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기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짐을 떠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부재만큼이나 네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죽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말해야 할 것은 너와 함께 했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다 하였을 테고, 그럼에도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말이 되어 나와버리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말이 진심에서 가장 먼 것이라고, 너는 나의 그런 마음까지 알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내 믿음은 옳았을까? 나는 네게 해야 할 말을 다 했던가? 아니지. 무엇이 아닌가 하면, 말이고 진심이고 그런 게 아니라, 너는 내가 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내가 그것을 바랐다는 걸 죽는 순간에야 알았다.

 너를 보고 싶었다.

 낡고 깨진 공중전화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잡초가 아니라, 부옇고 붉은 밤하늘이나 머나먼 곳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 고여 있는 가로등 불빛을 봤다.

 눈을 감기 전까지 그것을 보았다.

 저거 되게 따뜻해 보이네.

 그런 생각을 했다.

 담이는 저기로 오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저거 꼭 담이네.

 

/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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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가 탄로나는 걸 싫어하고 부끄러워할 거야. 나는 그중 하나여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라고 묻는 너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어. 사랑의 정도와 깊이를 설명할 단어 하나 떠올리지 못한 채. 네가 내 사랑이 얕다고 오해하고 좌절하게 된다면 언제나 나는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에만 연연하겠지.

 

 사랑해. 난 네 앞에서 가장 순수했고, 자주 뜨거웠고, 너무 들떴고, 많이 무너졌어. 사막에 핀 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너를 피워내고 싶었고, 네가 날아갈까 앞에선 숨을 멈추는 것따위 일도 아니었다고.

 

 [ 유성우가 떨어지던 밤 ]

 

-

 

 (...) 사랑으로 시작했으나 짝사랑으로 버려진단 뜻이다. 같이 시작하고, 홀로 네게서 버려지는 일. 사람이 많은 곳에선 반나절 가까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소심한 나를 끌어낸 건 너였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책과 영화, 주로 현실을 그리지 않는 매체에서만 등장했던 구세주가 내게는 너 하나였다. 하지만 스무 해 넘게 소심하게 살아온 내가 한 번에 바뀌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보내지도 못하면서 휴대폰 메시지 창을 오래 들여다보기도 했었고, 달을 빌미로 소원이랍시고 너의 연락을 기다려본 적도 있다.

 소심한 인간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 사랑의 당사자가 아무 말 않는다고 나는 어줍잖게 안주하고 있었다. 그에 내리는 벌일까. 끝에는 무관심으로 헤어졌다, 너의 사랑과 너와.

 온 마음 바쳐서 사랑하지 못해 후회는 한가득했고, 나는 너를 기억했으나 네게는 내가 떠올리기도 싫은 사람일까 전전긍긍하느라 미련이 덕지덕지 붙었다. (...) 1년 가까이 앓아온 상대를 기억하지 않고도 온전히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매일 밤은 울면서 잠들었고, 매일 아침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왔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너는 어떻게 지낼까. (...)

 1년이란 시간 동안 네가 싫어했던, 네게서 버려졌던 내 모습을 나도 조금 버렸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혼자서도 일을 시작하면서 예전의 나를 아주 조금 탈피했다. 사랑을 기점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면 네게 조금 더 잘할걸. 이 후회는 아마 평생의 숙제일 것이다.

 

 정말로 11월이다.

 

 나는 어떻게든 어제보단 오늘이 좋기를, 내일은 그보다 완벽하기를 바라고 있다. 너와의 이별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계절 속에서, 너와의 헤어짐을 기억하는 시작의 달에서 무슨 방식으로든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잘살아보려고 하고 있다. 이 글은 네게 전달하지 못한 채 또 언젠간 버려질 이면지에 물과하지만, 나는 나의 행복이든, 너의 행복이든 온전하길 바란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뜨겁고 다정한 연애를 하면서, 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온전히 완성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11월만 되면 떠오르는 네가 이 계절을 닮아 춥지 않기를, 어떤 시림도 품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의 팔 할은 네게 있으므로 너의 안녕이, 곧 나의 감사다.

 

 [ 상실의 계절 ]

 

/ 백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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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나는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
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 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조용히 밥을 먹는 너보다 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너를 고요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의 고요한 아이야, 가끔은
시끄럽게 너와 선루프를 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적이 찾아올 때
벌거벗은 나의 등을 안아 주던 게 생각난다
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

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
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

한 행성이 내게 멀어져 간 것은 재앙이다
네가 두고 간 것들을 나만 보게 되었다

너를뭐라불러야할지모르겠다

 

 [ 1226456 ]

 

-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진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 口 ]

/ 성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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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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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신형철